쉽게 따먹는 사과가 사라지는 이 시대,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표지의 강렬한 이미지는 오늘날 우리가 – 혹은 미국이- 처한 상황을 의미한다. 침체 Stagnation은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지만, 경제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사실상 미국 경제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회 또는 국가 전체가 녹아 내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혁신에 관한 혁신적 책
이 ‘책’은 상당히 야심차면서 자신감 있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조지메이슨대 경제학부 교수인 저자 타일러 코웬 Tyler Cowen 은 원래 전자책으로만 출판할 의도였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 경제가 침체를 맞게 된 원인이 혁신(확산) 부족이라는 점에서, 출판/미디어 업계의 혁신인 전자책이 얼마나 보급이 (안)되어 있는지 직접 입증하기 위한 실험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Creative Common License를 소개하는 책 스스로가 CCL로 저작권을 풀어버린 것과 같다고 할까?
그러나, 저자의 자신감 넘치는 의도는 의외의 방향에서 실패했다.
수많은 공신력 있는 전통 미디어 – NYT, WSJ, FT, Forbes, Economist 등 –에서 이 책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자, 저자는 혁신에 관한 혁신을 포기하고 물리적인 형태의 전통적 종이책으로도 발간할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 및 “경제학적”으로 쓰여진 “경제” 도서
경제학은 항상 최소의 자원을 염두에 두는 학문이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이 쓴 글(주로 논문)을 읽어보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 힘든 경우가 있다. 수식어를 줄이고, 최소한의 간결한 표현을 금과옥조로 여겼기 때문이다. 150여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이 책도, 불행하게도 그런 범주에 속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 읽기 어렵지만 내용은 탁월한 경제학 논문처럼 – 상당한 내공을 요구한다. 개념을 이해하고, 전후 관계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책이길래? … … … 제목을 살펴보자.
1 쉽게 따는 과일을 먹고 살았다
2 생산적이지
못한 신경제
3 인터넷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까?
4 쉽게 따는
과일을 먹은 정부
5 그렇게
엄청난 금융위기는 왜 일어났나?
6 우리가
해결 할 수 있을까?
“쉽게 따는 과일”은 오늘날 미국 경제가 실패한 근본 원인을 일컫는다.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갈린 정치적 양극화와 거기서 파생된 분배론, 부의 불평등이 원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쉽게 따는 과일”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상의 토지, 수많은 이민자, 강력한 기술력.
책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을 논리와 통계를 바탕으로 깨트리는데 (그리 두껍지도 않은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쉽게 말해, 정부의 소비지출, 교육비 지출, 의료비 지출은 GDP의 25%를 차지하지만 헛된 돈을 쓰고 있다는 주장이다. 쉽게 따는 과일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삽질’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침체’가 올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인터넷은 경제 상황을 개선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
저자는 인터넷의 역할에 대해서 다소 불확실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인터넷은 기존의 전통적 GDP 시스템에서는 측정 불가능한 혜택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고 말한다. 0에 가까운 비용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즐거움이라는 혜택은 분명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터넷은 경제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혁신은 아니라면서 분명한 선 긋기를 시도하고 있다. 최근 유행하는 ‘다운쉬프팅’처럼 물질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결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 행위가 아니라며 인터넷이라는 혁신을 –적어도 현 시점에서- 낮게 평가하고 있다.
“부자들도 인터넷을 하면서 다이아몬드를 하지 않고 트위터만 한다” (p.89)라며.
1930년대 대공황 때에,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경기 침체에 대한 우울함을 달래고 희망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에서 얻는 위안은 적어도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는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컴퓨터 한 대와 한달에 약 2~3만원 인터넷 요금만 내면, 전세계의 수많은 오락 거리를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축복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음반 시장이 몰락하고, 서적/신문 등 미디어가 몰락하는 것을 보면… 인터넷이라는 과일은 ‘블리자드’한테만 좋은 과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긍정적인 변화가 크게 일어나려면 완전히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이 필요
‘파괴적 혁신 Disruptive Innovation’이라는 개념은, 경영 분야에서 주로 쓰는데 존속적인 혁신이 아니라 소위 “깨는” 혁신이 일어날 때 게임의 법칙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표현이다. 저자는, 거대한 침체에 접어든 미국사회가 바로 이런 파괴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희망의 원천은 크게 세 가지라고 주장한다.
1) 인도와 중국의 (공급/수요자로서) 과학과 공학기술에 대한 관심
2) 무한한 교육적 가치를 지닌 인터넷
3) 미국 교육제도 개선의 희망
거기에 덧붙여서 “과학자의 지위를 높이자” “정치적 갈등을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라면서 미국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규범적, 추상적 결말이 아쉽지만 현재를 진단하는 통찰력
지난 300여 년간의 미국 경제 흐름을, 단 몇 십 페이지에 압축하면서 보여준 통찰력 있는 분석은 인상적이었다. 나아가 왜 미국 경제가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단도 탁월한 시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에 이르러서는 다소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다. 너무 거창하게 판을 벌였던 탓일까? 기술적 혁신이 새로운 미국을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점까지는 충분히 수긍할 만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 “과학자의 지위를 높이자”라는 결론에 달하게 되면 고개를 살며시 흔들게 된다.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일까? 아니면 저자의 의도가 너무 야심 차서 수습하기 벅찼던 것일까? 어찌되었건 결말은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거기까지 접근하기 위한 저자의 시각은 충분히 새겨 들음직하다.
<참고>
저자 Tyler Cowen 블로그 www.marginalrevolution.com
위클리BIZ 인터뷰
기사 http://biz.chosun.com/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