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인문학이 싫다. 그건 마치 플레밍의 법칙 대신 락커인 마냥 손가락으로 peace를 그리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물리학에 대한 감정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작 학생 때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전부 경제학과 경영학에서 나오는 줄만 알았었는데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사회에 나와보니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정작 인간의 존재 이유, 사유의 방식, 심리적 동기 등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경시해왔던 ‘인간’ 자체에 대한 경외감이 깊고 또 깊어지면서 예전보다 더 멀어지고 더 어려워졌다는 게 사실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문학이 싫다. 마치 존 앰브로즈 플레밍 경(Sir)을 이해하려고 들면 들수록 정작 더 싫어졌던 것처럼.
그런데, 정말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보르헤스를 말하고, 라깡을 말하고, 아도르노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사람들이 떼거지로 등장하기 때문에 플레밍 경과 동급으로 취급한 것인 것이었을까?
여기 한 국문학 교수이자 스스로 ‘인문학 과격주의자’라고 칭하는 40대 ‘아줌마’가 있다. 주로 하는 일이라고는 최백호부터 장기하까지 노래를 들으며 센치한 감상에 빠지거나, <연애시대>부터 <신사의 품격>까지 드라마를 청승 맞게 본방사수하는 게 특기이다. 어디 그 뿐이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부터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에 이르기까지 책을 논하고, <러브 액츄얼리> 부터 <은교>까지 다양한 영화에 대한 ‘썰’을 푼다.
소소한 일상에 숨겨진 인문감성
온갖 수많은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이처럼 문어발, 백화점 식의 소재로 논하고자 하는 목적은 결국 단 한 가지 ‘인문감성’을 채우고자 함이다. 소소하게 지나가는, 돌이켜 곱씹어 봐야지만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미묘한 순간들. 그 순간 순간 속에서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인문감성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자 이 책의 목표이다.
인문감성이란 마치 이런 순간을 뜻할 것이다. 내 애인의 스마트폰에 어떤 앱이 깔려 있는지에는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을지언정, ‘가장 최근에 재생한 노래’ 또는 ‘가장 많이 재생한 노래’가 무엇인지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결핍된 그 것말이다.
[500일의] 썸머가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을 물은 남자였다. 참으로 별것도 아닌 희한한 일로 결혼까지 한다고 생각할 줄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자기 애인이 읽고 있는 책이 어떤 책인지를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물어보는 일은 대단한 사건인 것이다(p. 214)
그러니, 일상에서의 사소한 의미부터 재발견하는 작업을 시작하라고 주장한다.
공주의 망상이 진실로 빛나는 때
사랑이 사유로 반짝이는 순간
나에게서 낯선 행복을 발견하는 순간
고독이 명랑해지는 순간
상처가 이야기로 피어나는 순간
우리가 기꺼이 환대할 순간
5개 챕터의 제목들이다. 제목을 처음 보는 순간 ‘소녀 또는 공주스럽다…’ 내지는 ‘낙관주의 혹은 망상주의자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저자 한귀은 교수는 솔직하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를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야 말로 자기 자신을 찾는 첫번째 단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애인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거짓말을 하면 결국 자기 자신이 속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했을 경우, 내 애인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 자산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p. 87)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비록 겉으로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여성을 위한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40대 아줌마 선배가 20대와 30대 후배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시각을 풀어서 설명해주는 느낌이랄까? 보편적 감성으로서 남성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는 부분도 있는 반면, 일부 글에서는 약간 망설여지고 머뭇거려지는 순간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 명의 남성 독자로서는 조금 아쉽다고 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이 책의 진실된 단점 중 하나를 꼽자면, 짧은 감상과 치유는 될 수 있어도 그 울림의 소리가 내면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중문화를 통해 가볍게 풀어나가고자 했던 이 책의 장점이 동시에 단점이 되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게 스쳐가는 모든 순간 속에서 새로운 감성을 느끼고 자기 자신에게 충만하고 싶다면 일독해볼만한 책이다.
1.혁신의 독점 이론: 창작자들에게 복제 권리나 라이선스를 판매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창작자를 보호해야 혁신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주장.
2.베끼기의 역설: 경우에 따라 오히려 베끼기가 창작 활동을 촉진하는 경우.
이 책은
혁신의 독점 이론을 반박하고 오히려 베끼기의 역설을 옹호하는 여러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지적 재산권법이
‘모든’ 창의적 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모방이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며 이를 권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베끼는’ 길이 산업 전체의 역동성과 창의성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번성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두 줄로 요약하자면,
특정 산업에는
베끼기가 많더라.
놀랍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이 잘 일어나더라! 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서론부터
돌직구를 던진다. 상당한 흡입력을 지닌 채 관심을 끈다. 일단
서론을 읽으면서 주어진 몇 개의 질문을 곱씹어보면 책의 나머지를 안 읽고는 못 배기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주방장들은 다른 사람들이 조리법을 베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새로운 요리를 계속해서 창작할 수 있는 것일까?”
“미식축구 감독들은
경쟁 팀들이 자신의 새로운 전술을 베끼고 연구할 것을 알면서도 왜 계속해서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 것일까?”
“코미디언들은
법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베끼는 행위를 규제하며 창작 활동을 촉진할 수 있었을까?”
같은 질문에 대한 상세한 답을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 책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두 명의
법대 교수가 쓴 이 책은 지적재산권 전문가답게 다양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며 검증하여, 여러 분야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을 도출해내고 있다.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서 반대되는 사례를 끊임 없이
질문하고 왜 그럴 수 있는지 WHY 질문을 던지며, 반대 사례를 궁긍적으로 반박하며 본인의 주장을 채택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상당히 단계적으로 지적(知的)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 아쉽게도 각 사례에 대해서 지나치게 상세하게 설명을 하거나, 비슷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다소 지나치고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다만, 분명히 이 책은 결코 쉽거나 친절한 책은 아니지만 ‘법’ 자체를 딱딱하게만 여기거나 일반인의 삶에 동떨어진 것이라고만
여겼던 사람이라면 요리, 패션, 스포츠 등의 친숙한 분야에서의
사례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들을 팝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작가로 앤디 워홀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마릴린 몬로, 마오쩌둥의 초상화부터 캠벨 수프 깡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오브제를 가지고 작품을 표현해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 특히 최근에 들어서 - 이러한 팝 아티스트들은 원작이 되는 작품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본인의 작품에 대해서는 오히려 저작권을 주장하고 법적인 보호를 요구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면, 그/그녀 자신도 겸허하게 본인의 작품이 또 다른 누군가의 영감을 위한 밑거름이 될 법도 한데 정작 그런 개방과 관용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방을 통한 혁신과 창조는 당신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개방이 있다면, 혁신은 그리 먼 곳에 있는 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조건적인 CTRL+C, CTRL+V는 물론 곤란하겠지만.
P.S. 좋든 싫든, 맞든 틀리든 ‘창조경제’가
대세다.
가수 싸이가, 아니 정확하게는 싸이의 ‘젠틀맨’
안무가 창조경제의 모범사례라고 지난 4월 18일
박대통령이 칭찬한 적이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브.아.걸.의 시건방춤 안무가에 저작권료를 지급했기 때문이란다.
과연 싸이는
‘창조경제적 행위’를 한 것일까? 시건방춤 안무가는 적당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은 것일까?
물론, 안무가 입장에서는 지나간 작품에 대한 대접을 받고 덕분에 본인도 다시 한번 조명을 받을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무계 나아가 가요계 전체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싸이의 행위가 ‘창조경제의 모범사례’라고 칭찬받아
마땅한 것일까? 본 책에서 '저작권료'가 핵심 주제는 아니지만, 모방과 혁신의 관점에서 저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늘진 삶 속에서 나와 7년 전 본인이 스스로 등졌던 뉴욕의 선셋파크로 유배의 발걸음을 향한다. 선셋파크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쓸쓸하고 우울함뿐 이다. 이 곳의 네 젊은이들은 희망이 없고, 우울하고,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 제도권의 틀에서 조임을 당하며 살고 있다.
폴 오스터의 전작들이 그러하듯, 뭔가 대 사건이 터질 듯한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간다. 해가 바뀌고 1월 3일, 4일, 5일, 6일…. 매일 화자는 바뀌고 날짜는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불안감은 점점 커진다. 폴 오스터는 독자의 심박수를 최대한 끌어 올리기를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일상의 지리멸렬함과 우울함에 대해서 논한다.
지쳐버린 심장이 다소 수그러들 무렵, 드디어 사건이 터진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마음가짐일 뿐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면서 모든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마일스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라는 마일스의 다짐은 그가 더 이상 현실을 회피하고 도피하는 10대 소년이 아니라, 비록 미래에 대한 희망은 없을지언정 현재라는 현실을 직시하려는 책임을 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한결같이 아프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태반이다. 정말 아픈 것은, 마일스와 그의 친구 빙 네이선 같은 젊은이들만이 아픈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일스의 아버지 모리스 헬러도 아프다. 모리스 헬러의 친구들 – 60살이 넘었을 –도 아프다. 모리스의 전처이자 마일스의 어머니도 아프고, 모리스의 현처이자 마일스의 양어머니도 아프다. 모두가 아프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제목의 책이 인기를 끌었었다. 그렇지만, 사실 아픔은 청춘만의 특권이 아닌 것이었다. 그 ‘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제목의 의도에 대해서만큼은 동의해주고 싶다. ‘책에서 주요한 소재로 나오는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2차대전 이후의 삶을 그린 영화이다. 현실로 돌아온 군인들이 어찌되었던 각자의 삶에 – 비록 아픔과 실패가 있을지언정 – 적응하고 민간인으로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선전물이다. 렌조 마이클슨과 모리스 헬러가 30년 전에 '최고의 해'를 보내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마일스 헬러도 결국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결국 밝은 미래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마저 부정해버리면 결국 미래와 현재 모두를 잃어버린 채 과거에 집착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또 다시 현재와 미래를 부정하는 것이며 삶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니까 인생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아픔이 있기에 오늘을 살아갈 수 있으며,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충실한 오늘에 기반한) 내일을 맞이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폴 오스터는, Occupy Wall Street 운동을 예견이라도 했듯, 뉴욕의 좌절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을 조심스럽게 이 책을 통해서 건네고 있다. 아픔과 좌절은 무기력하게 느껴지겠지만,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현실은 현실로서의 값어치가 있다고.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온 사람들이 정작 왜 불행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만약 정말 ‘착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행복하고 나아가 성공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접근 방식만 놓고 본다면 상당히 독특한 자기계발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새로운 윤리사상이라 할 수 있는 ‘덕윤리’를 통해서 개인이 어떻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가를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접근의 책이지만, 아쉽게도 저자 서문을 넘기고부터는 흥미를 유지할 만한 요소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책의 구성은 1. 착함이란 무엇인가, 2. 당신은 이성적인가 감성적인가, 3. 어떻게 덕을 실천할 것인가 라는 3장 아래에서 15개의 챕터가 있으며, ‘덕윤리’가 어떻게 21세기의 새로운 선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 일관된 메시지를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심리언어학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인지과학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한다. 본인의 학문적 커리어처럼 본 책에서 ‘선함’과 ‘덕윤리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표현 방법이나 표현 내용에 있어서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느껴진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기존의 도덕 관념 혹은 상식에 대해서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하나하나 반박을 하면서, 그 대항마로 내세우는 ‘덕윤리’는 실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덕윤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어디 시골 동네 이름인지도 모르겠다만, 덕윤리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덕윤리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해져야 할 작업은 덕윤리의 정의를 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핵심 과정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마치 당연히 덕윤리에 대해서 독자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출발하는 기분이다.
예를 들어 보자.
지금까지 공리론과 의무론, 이성의 시대였다.
그러나 물질주의와 결과주의 시대는 점차 막을 내리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는 ㅇㅇㅇ이 힘을 얻을 것이라 기대된다.
라고 한다면, ㅇㅇㅇ이 무엇이든 간에 ㅇㅇㅇ의 정의를 먼저 자세히 해주고 왜 ㅇㅇㅇ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것이 보편적인 논리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 책에서는 ㅇㅇㅇ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 자체를 너무나 당위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절차는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물론 ㅇㅇㅇ이란 덕윤리다.
두 번째 문제점은, 기존의 의무론과 공리주의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약점을 들어서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면서, 덕윤리에 대해서는 한없이 무한사랑에 가까운 방어논리를 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덕윤리는 마치 완전무결하고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즉, 저자 본인이 덕윤리에 대해서 속된 말로 꽂혔다고 해서 너무 지나치게 아전인수격으로 높게 평가한다는 점이다. 이는 첫번째 문제점에서의 당위성에서 파생된 것이라 생각한다. 덕윤리의 도래 자체가 너무나 당위적이기 때문에, 덕윤리를 비판하는 모든 논리에 대해서 방어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문제는 그 방어의 도가 지나쳐서 마치 용비어천가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세 번째 위험한 부분은 편파적 사랑의 가치에 대해 주장하는 부분이다.
‘차별적이고 편파적인 사랑을 할지라도 그 대상을 확대시키면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고… 이러한 사랑의 확장은 인류 전체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난 이런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국수주의와 민족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오랜 역사에 걸쳐 입증된 사례인데, ‘나쁜 동기’를 지닌 공동체에 대해서 반대하고 더 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공동체를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지구상에 얼마나 될 것인가? 만약 이게 정말 보편적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전 인류가 초인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믿는 책상머리 연구자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이 없었던 것은5절 오타쿠는 착할까, 착하지 않을까라는 부분이다.
오타쿠는 결과적으로 해롭다고 비판하면서, 공리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오타쿠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해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는 착각이며, 덕윤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지극히 해로운 존재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공리주의적 주장에 대한 비판을 약간 비틀어 보자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자는) 덕윤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덕윤리는) 좋은것’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저자 역시 자기 편의주의적으로 공리주의적 관점에 빠져서 덕윤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불필요하게 오타쿠를 꺼내어 들어서 본인의 설익은 주장을 논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저자는 오타쿠를 변태 또는 역겨움의 존재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논리 전개 자체의 미흡함은 차치하더라도, 너무나 편협한 주장이 아닌가 싶다.
더욱 신기한 것은, 저자 본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 관해서 장문의 리뷰를 썼다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은 그 내용 자체가 오타쿠에 관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콘텐츠를 둘러싼 팬덤 자체가 거대한 오타쿠 문화를 형성한 그야말로 오타쿠를 위한, 오타쿠에 의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오타쿠를 비판하는 자가 오타쿠 문화의 핵심에 관한 리뷰를 썼다?
이 정도 내용으로 정성을 들여 쓸 정도면 이미 오타쿠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싶다. 본인의 과거에 대한 자아비판적 성격으로 본 챕터를 집필한 것인지, 혹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본인은 어디까지나 애호가이며 매니아일뿐 오타쿠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오타쿠가 아닌 내가 보기에, 오타쿠에 대한 오타쿠적 비난 자체가 오히려 더 역겹게 느껴지지만. 만약 착함이라는 항목에 겸손함이 포함된다면, 그러한 덕목에 대해서도 저자본인 스스로가 성찰이 필요할 것이라고 진단을 내려보기를 감히 권한다.
철학과 윤리를 논하는 '논리적인' 책은 거의 읽지 않은 나로서는 그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는 책이 몇 권 되지 않는다. 다만 최근에 읽은 기억나는 책이라곤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조금 확대하자면) ‘만들어진 신’ 정도일 것이다. 비교 대상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지는가? 각자 자기 분야에서 30년 이상의 내공을 쌓은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불공평한가? 똑같은 한 권의 책을 두고 읽어야 하는 ‘독자’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평등하다고 생각된다. 모기룡 씨는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 논리에 있어서 불필요한 부연설명이 너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정작 본인의 핵심 메시지도 놓치는 우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책’은 저자의 주장만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여러 부분에서 이도 저도 아닌 방어논리가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정작 저자의 논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편이다. 이는 인터넷 글쓰기, 블로그 포스팅 성격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 같다. 만약 저자가 덕윤리의 가치에 대해서 주장하고 싶다면 끝까지 밀어부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데, 자기 소신이 필요한 곳에서는 한없이 움츠러들면서 (마치 악성 댓글에 미리 ‘쉴드’를 치듯이) 정작 자기 소신이 불필요한 곳에서는 과잉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소신과 내공이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일관적으로 펼쳐 나가기에는 아직 미흡하지 않나 싶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덕윤리는 A라는 점에서 훌륭하다. 물론 B도 나름 괜찮은 부분이 있다.덕윤리는 B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덕윤리는 A 뿐만 아니라 B도 포함하기에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이런 황희 정승같은 논리가 비겁하게만 느껴진다.
나의 최종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는 좌뇌형 인간이며, 감성보다 이성을 중시한다.
나는 의무론적이며 공리주의적 사고를 중시한다.
따라서 나는 의무론과 공리주의적 관점에 기반한 '선함'을 추구하겠다.
그러므로, 나는 덕윤리가 논하는 선함에 대해서는 굳이 관심 갖지는 않겠다.
p.s. 베스트셀러 ‘넛지(Nudge)’의 공동 저자인 Cass.R.Sunstein은 시카고대학 로스쿨 교수로서 주로 마이너리티의 중요성, 사회 통합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사람 심리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며 왔지만, 그의 기본 뿌리는 어디까지나 법률이며 법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에서는 계속해서 ‘심리학자 선스테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통섭의 관점에서 혹은 선스테인이 심리학 저널에도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에 심리학자라고 칭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기본 뿌리는 법학자라는 것을 밝히고 싶다(뭐 선스테인 본인이 ‘나 심리학자요’라고 말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