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년 전부터 눈독들이고 있던, 강남역의 우동/메밀 집이 있다.
불과 3일전, 조선일보에 서울 시내 유명 메밀국수집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 소개한 맛집 중, 내가 눈독들였던 그 가게가 당당히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오래되었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80 여 년 전 처음 문을 열었고,
90년에 강남으로 옮겨서 창업주의 아들/며느리가 운영하는
할아버지급 포스를 지닌 곳인줄은 몰랐다.

2.
어제 낮. 살포시 더운 날씨에 뭔가 싸- 한게 먹고 싶어서
마침 근처에 들른 지인과 함께 바로 그 메밀국수 집을 찾았다.
자그마한 공간에 할머니 할아버지 (주인 내외이신듯한)가 서빙하고,
메뉴도 메밀국수/우동/냉모밀/유부초밥 으로 단촐하기 짝이 없는 가게의 입구에서
앞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꽁무니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테이블에 이미 앉아있는 사람들조차도 대부분이 젓가락조차 집지 못한채
멍하니 주방만 바라보는 광경을 보면서 아아...이거 제법 기다려야 겠구만 생각했다.

약 15-20분을 기다리고,
주문을 수정하고, 주문했던 주문을 다시 주문하는 과정을 거쳐서
메밀국수와 유부초밥을 입에 쑤셔넣고는 제법 만족한 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3.
평소에 서비스 산업은 돈을 받는만큼 값어치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다.
불친절한 식당에서는 메뉴판을 바닥에 내팽개친적도 있고
매니저와 싸운적도 있고, 불친절한 종업원을 고발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나치게 상대의 물신주의적 태도에 질려버렸을 때의 일이다.
또, 대부분의 행동은 대형 식당이나 프랜차이즈에서 부린 난동이다.

어제의 그 식당에서만큼은
서빙 늦게 나온다고, 주문한거 왜 엉터리로 받아들이냐고,
우리가 먼저 나오고 먼저 주문했는데 엉뚱한 곳에 먼저 준다고 (유부초밥이 그랬다)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릴만한 그런 공간이 절대 아니었다.

더운 토요일 오후, 밀어닥친 손님들을 위해서 정신없이 움직이고 닦고 나르는
할머니의 모습 (죄송한 말씀이지만 할아버지는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은
단지 돈을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자는 장사꾼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창가쪽에 앉아있다가, 우리보고 안쪽을 닦았으니 그쪽으로 옮기라고 직접 말하시고는
불과 1~2분만에 깜빡 하셨는지, 주방에서 나온 우리 음식을 가지고 (비어있는) 창가쪽으로 가셨다가
일종의 몸개그를 펼치시면서 다시 안쪽 자리로 쟁반을 가져오시는 할머니를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연세 지긋하신 분이 순간 정지하고 180도 턴하는 모습은 불순하게도 우스꽝스러웠다)


4.
어제 이전에 단 한번도 그 가게에 가본적이 없지만,
오가면서 밖에서 본 기억으로는 문 밖으로까지 손님들이 기다리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토요일 일요일 낮에 교보문고에 자주 들르는 편이지만, 적어도 내 기억으론 단 한번도 없었다.

어제 가게가 그 모양으로 폭주해버린건
단정지어 말할 순 없지만, 신문 기사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유명했지만" 가게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버린 것 같아서 안타깝고
신문 기사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내멋대로-)

물론 신문기사 하나만 가지고 어제 손님이 면발마냥 불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입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해보고 싶다.
불특정 다수 독자에게야 덕분에 좋은 맛집 정보를 얻었고
어찌되었건 할머니할아버지도 매상이 올라서 좋은 일이지만
밀어 닥치는 손님들을 서빙하다가 오히려 병이 나서 병원비가 더 들어갈 형편으로 보였다.

심지어 어제 할머니조차도, 밀어닥친 인파에 국수를 몇번이나 삶았는지 모르겠다며
평소와 다른 상황에 당황스럽고 피곤하시다는 반응을 보이셨다.

유명한 맛집 중엔 서비스가 불친절하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린다.
심지어 돈내고 가면서 음식만 먹는게 아니라 (일부러) 욕 먹으러 가는 가게도 있다.
식당의 유명세와 서비스(친절도) 사이의 관계는 우하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둘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입증할 수 없으나 - 어딘가 이런 연구가 있을 것 같다 -
내멋대로 해석해보자면........ 다소 극단적으로 아래와 같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어제의 메밀집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소박하면서 때론 깜찍하기까지한
주인 할머니의 (친절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서비스에 가산점을 부여한 10점을 주고싶다.


5.
관련 기사나 포스팅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적어도 나는 그 가게가 어디인지 공개하고 싶지 않다.
밀어닥치는 손님들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행여나 불친절하게 변하시거나 싸가지없는 젊은 놈을 고용할까봐 걱정이다.

모든 정보가 다 공개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비밀리에 남아 있어야 정보로서의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특히 무한복제가 가능하고 배타성을 지니지 않는 디지털 재화라면 모르겠지만
한정된 자원 속에서 배타성을 지니는 재화/서비스에 관한 정보는 폐쇄적일 필요도 있다.

쭉정이 같은 고객을 걸러내는 Demarketing 이 보편화되는 것도
업주의 수익성 혹은 고객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에서
홍보가 되고, 널리 알려지고,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고... 그게 능사는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맛집. 나만이 알고 있는 쾌적한 쉼터
... 이 얼마나 멋지고 야릇한가!


* 별첨) 유명 식당에서 생긴 황당한 사건들
Posted by OI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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