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 하명희 / 북로드
oo야, 우리 영원히 사랑하자
xx야, 우리 오래오래 사랑하자.
영원을 속삭이던 남자와 당장은 모르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다가올 그 날까지 사랑을 이야기하던 남자가 있었다. 영원의 남자는 어렵사리 쟁취하게 된 사랑에 영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반면, 언젠가는 헤어지고 또 다른 만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는 영원 대신 오래라는 제한을 붙였다.
두 남자는 사실 한 사람이었다. 영원이 영원에 이르지 못하는 경험을 겪고 나자, 영원을 대신하여 하루 하루를 오래 오래 모으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접근을 하게 된 것이다.
영원과 오래의 사이에는 고독이 존재했다.
영원할 수 없는 순간이 멈추고, 또 다른 ‘영원’이라는 환상이 찾아오기 전까지의 시간을 남자는 어찌 살아야 할지 몰랐다. 슬픔인지도, 후회인지도, 각오인지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시간은 절로 흘러갔고 어느 순간에야 깨달았다. 고독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는 영원이라는 불가능 대신 오래 + 오래를 택하기로 하였고, 혹시 중간에 빠져버린 톱니바퀴는 고독이라는 본드로 메꾸기로 한 것이다.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랑이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고독을 알게 되고, 고독과 친숙해졌다고 생각할 무렵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사랑을 해보지 않으면 고독을 모르고, 고독을 겪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소설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사랑이 뭔지도 모른 채 고독을 껴안게 된 여자와, 고독 속에서 살면서도 사랑을 모르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원했건 원치 않았던 단절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일방향적인, 그야 말로 PC통신 시대스러운 관계의 이야기다. 02로 시작하는 집전화로 설레임을 건네고 싶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을 때, 그 설레임은 유보될 수 있고 오히려 더 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연결되지 않은 전화가 가져오는 고독은 단지 잠깐의 기다림일 뿐이며 분명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그와 그녀는 기다림의 즐거움을 믿고 더 큰 보답을 기대한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소위 모바일 유비쿼터스 시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나를 ‘씹는’ 것이기에 설레임은 곧 바로 ‘1’이라는 숫자와 함께 분노로 나타날 것이다. 받지 않는 전화는 나의 고독을 잠시 연장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의미하며, 이는 나아가 사랑의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어떻게 견뎌내야 할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영리하게도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대 초반, 아직 우리가 ‘스마트’해지기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스마트’한 연애보다 더 큰 사랑은 고독과 기다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물론 그 보답은 아무도 기약할 수 없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 드라마 작가 하명희가 쓴 본 소설은 원포인트의 따뜻한 감성이라는 장점이 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시점에서, 극히 미미한 순간에 반짝이는 감수성은 읽는 이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어 주곤 한다. 마치 족발 집에서 일하는 프랑스 유학파 요리사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이렇다. 일방향 사랑을 하는 세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을 응시한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은 세 번째 사람만을 쳐다본다. 이 시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고독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며시 비치는 세 번째 사람의 얼굴 결정적 포인트다. 그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다. 일방향 사랑의 종착역이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 곳에도 마음이 뻗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은 모른다.
내가 오래 전에 버렸던 이름을 그가 다시 불러 주었다. 그는 나의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남자처럼 내게 다가왔다(p.139)
꽃은 원래 그대로인데 이름 붙이고 의미 붙이고 애착한 건 나다. 꽃이 내게 이름을 붙이라고 하지도 않았고 의미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순전히 내 뜻이었다 (p.178)
아쉬운 점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가 생생함이 떨어지고 균형이 맞지 않다는 점이다. 사랑을 하면 유치해지거나 바보가 되기 때문일까?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라던지 가지고 있는 힘에 비해서 유독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지나칠 정도의 가벼움 혹은 오글거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역시도 애절한 사랑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아래 문장에서의 ‘홍아’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똑 같은 드라마를 봐도 사람에 따라 그 감상이 다르다. 홍아가 리얼리티가 없다고 평한 드라마가 정선에겐 가슴을 두드리는 울림이 있었다. (p.210)
"해당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