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한숨을 쉬면서 덮어버린 책을, 어디 끝까지 읽어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다시 펴고 또 덮고, 또 펴고…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이 책은 1%에 속할지도 모르는 (물론 절대 아니지만), 혹은 스스로가 99% 인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나에게는 결코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의 주장은 한결 같다.
“갚고 싶어도 못 갚는 건 내 책임이 아니다”
“ 목 갚을 줄 알면서도 빌려 준 금융 시스템은 약탈적일 뿐이다” 라며.
1: 99 프레임의 편리함
책에서 드는 예시가 있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병원의 실수로 고혈압 처방을 받고 약을 받았다. 병원은 환자가 자기 병도 모르고 엉뚱한 약을 받았다며 오히려 환자를 탓하고, 환자는 본인의 무지함에 대한 자괴감에 빠진다 (p.187)
그러나, 당뇨병을 치료하라며 하루에 1알씩 복용해야 하는 약을 처방 받았는데, 일주일에 1알씩 먹는 것은 물론이며 대신 매일마다 술과 고기를 먹는 환자에 대해서는 왜 비난하지 않는가?
그것은, 저자들이 바라보는 사회의 프레임 자체가 99%의 환자 대 1%의 의사로 나누기 때문에, 99%의 환자 편을 드는 것이, 설령 환자가 틀린 행위를 했을지라도,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1:99의 프레임은 편하다. 쉽다. 간결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혹을 받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하다. 선동이 될 수 있으니까.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사회 통합의 가장 기본은 공통의 적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던가?
단어선택도 절묘하다.
“다만 보통 사람에게는 이자율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는 게 문제 아닌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우리의 전전전전 대통령도 ‘보통 사람’ 이었으니까.
소비자는 절대 선인가?
책에서 (과도한) 부채를 짊어진 사람들은 결국 약탈적 금융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변호한다.
나아가,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반드시 개혁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명확하게 ‘적’을 규명한다. 그러나,
소비자는 부동산 광풍, 교육 광풍에서 절대적으로 종속 변수인가?
소비자는 순진한 피해자 일 뿐인가?
빚을 갚을 능력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돈을 빌려준 금융회사가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논리라면,
몸에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담배를 만들어서 판 담배회사도 당연히 잘못이고,
역시 몸에 해로운 걸 알면서도 햄버거를 판 맥도날드도 잘못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사회가 흡연자의 손을 들어주는 미국이 아닌 이상에야) 제조 회사에 책임을 묻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물론, 지금까지 이런 목소리가 대세였다고 저자들은 말하며, 사실 이러한 사고 자체가 잘못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갚으려고 애를 써도 못 갚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여기에는 빌려 준 자의 책임이 훨씬 크다” (P. 54)
그렇다면, 빌려주지 말았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못 갚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돌려 받기를 체념해주길 바란다는 말인가?
투자는 개인의 책임이 아니던가?
‘충동적인 투자를 유발하는 것은 사실상 사기에 가까운 행위’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모든 상품/서비스의 마케팅은 다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본 책에서도 인용한 책인 마틴 린드스트롬이 지은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에 나온 대로 가장 좋은 것은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속고 속이는 것이 마케팅이고 현대 자본주의라면, 개개인이 똑똑해지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만큼은 저자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기업을 통해 금융 안전망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며, 채무와 관련된 민생 운동을 펼쳐서 사람들을 똑똑하게 깨우치려고 해왔으니까. 그러나, 이 책은 너무 나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까지도 필요 없이, 차라리 ‘금융 회사는 약탈자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돈 빌리지 마라’라고만 이야기했으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빌리는 건 빌리는 거고, 안/못 갚는 건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라는 논리는 어떻게 나오는지 잘 이해할 수 없다. 책의 의도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오히려 실패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대안은 무엇인가?
부채라는 시한 폭탄이 대한민국 가계, 기업, 심지어 정부 –최근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으로 인한 부채가 다행스럽게도 이슈화되고 있다. 어느 누가 대한민국 정부의 부채가 GDP 대비 아직 안전한 수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가 동시 다발적으로 폭발하기 일보직전인 현재에, 이런 기회를 통해서 한번쯤 시스템을 점검하고 되돌아 보는 목소리는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우면서 치명적인 부분은, ‘so what?’이 없이 그저 현재의 자본주의 혹은 금융시스템에 대한 문제만 나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빚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당당하게 사회적 시스템을 요구하자. 그런 채무자의 목소리야말로 합리적인 채무 조정과 채권 회수, 그리고 진정한 사회 경제적 안정을 이끌어 낼 수 있다”라며 실컷 기대감에 가득 차게 하더니 맥 빠지게 만든다.
"해당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P.S. 세대 간 제로섬 게임과 폭탄 돌리기
몇 일전 대학 친구를 만났다. 어린 딸 하나를 두고 있는 목동 전세 거주자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매물이 하나 나왔는데, 2~3억 빚을 내서라도 그걸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20년간 은행의 노예로 사는 거지, 뭐’
라고 했지만, 적어도 자녀 양육과 교육의 측면에서 그 정도 어려움은 감내할 수 있다는 나름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물론 주위에선 다 만류하고 있지만.
문제는, 지금 40대, 50대에서는 저런 식의 투자 혹은 투기가 많았다는 것이고 지금은 그걸 받쳐줄 20, 30대가 줄어 들었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언론에서 하우스 푸어 이야기가 나올 때면, 단지 소득의 수준으로 계층을 구분 짓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세대 간의 문제로도 충분히 나눠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베이비부머, 혹은 (구) 386 세대가 짊어진 폭탄을, 20대와 30대가 물려 받아야 하지만 지금 젊은 층에서는 그럴 여력이 안되니까, 윗 세대가 여전히 껴안고서 어려워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물론, 지금의 20,30대는 절대 그 폭탄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마 그렇게 세대 갈등으로 가게 되면 현재의 부채 폭탄은 꽝 터져버리지 않을까? 영화 ‘파이트클럽’에서 신용카드 회사 서버를 폭파시킬 생각을 하는 것처럼, 언젠가 터질 폭탄이라면 차라리 시원하게 터져버리는 게 (무척 극단적이지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젊은 세대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저자들이 말하는 99%가 누구를 지칭하는 지 잘 모르겠지만, 3포 세대 젊은이들의 눈물은 누가 닦아줄 것인가?
... 지나치게 나가버린 이 책을 읽다보니, 내 사고도 너무 나갔다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