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가 2000년 1월부터 약 2년간 월간 "VOICE"에 연재한 에세이를 모은
'문명의 우울'을 읽다가 심히 마음에 와닿는 한 편이 있어 가볍게 바꿔서 옮겨본다.


- 내가 아는 일본 문화라고 해봐야, 편협하기 짝이없는 기타노 다케시와 무라카미 류 같이
   거칠고 터프하고 야성적인 아저씨들 뿐이며
   최근 들어 서점에 쏟아지는 말랑말랑한 표지로 장식된 소설이나,
   배우 얼굴만 보고 있어도 하품이 주룩주룩 쏟아질 것 같은 영화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무라카미 류 이후로 23년만의 대학생으로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히라노 게이치로만큼은
   아저씨가 아닌 75년생 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작품을 살펴보는 리스트에 속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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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도'와 '이니까'의 차이는 무엇일까?

PS2는 게임기 인데도 DVD 기능이 지원된다.
PS2는 게임기 이니까 DVD 기능이 그닥 좋지는 않다.

PS 2가 출시될 당시 마케팅 포인트가 저랬다.


- SONY의 영악함이 드러나는 이런 마케팅 포인트는, 그 이후 쏟아지는
   디지럴 컨버젼스 상품에 마구마구 해당될 만한 컨셉이다.

   MP3가 안들어가고, 동영상 재생이 안되는 전자사전은 시장가치를 상실한 제품이고
   (실제로 효과가 없다는 연구가 쏟아지고 있지만) 닌텐도DS는 두뇌개발 제품이고
   친구 중에 한 녀석은 이 나이 들어서 민망했던지 집에다가는 블루레이 플레이어.라고
   이야기하고 최근 PS 3를 구매했다.


뭔가 본질에서 벗어난 건데도 그럭저럭 괜찮다 싶으면 '인데도'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본질에 비하면 부족하다 싶을때는 비겁하게 '이니까'로 변명하는 현상에 대해
히라노 게이치로가 이미 8년전에 비판을 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미국제 노란색 연필 + 지우개를 써본 사람은 알것이다.
지우개 따먹기 용으론 다소 부적합하지만 어쨌던 잘 지워지던 Tomboy 잠자리 지우개가 없어서
미친듯이 베낀 숙제를 고치려고 대가리에 달려있는 지우개로 지웠다가 노트를 북- 찢어먹은 경험 말이다.

낭패인 상황에서도  연필 '인데도' 지우개가 달려있어!!!! 라고 좋아해야 하는 걸까?
혹은 연필 '이니까' 지우개는 후질 수도 있지 뭐! 라고 마스터베이션하는게 옳은 걸까?


세컨드 라이프가 (still ???)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virtual Reality 가상현실에 대한 가능성이 증대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실제성 혹은 실재성에 있어서는 '이니까' 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Sub / Second  에 불과해야 할 것들이
언제부턴가 슬금슬금 현실과 실재를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밑도 끝도 없는 맹목적 신뢰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는 '이니까'로 피해가는
양면적인 자기 믿음과 자위가 동시에 보이는 것 자체가 컨버젼스와 빅뱅 시대의 숙명인 것일까?

- Virtual Reality 와 Social Netwoking 이 공감과 소통이라는 욕구에 대해 '인데도'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
아우라를 잃어가는 시대에 살면서 '인데도'를 추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완벽주의에 대한 집착일까?

혹은

- 3D 기술이 발전하고, HMD같은 기기가 보급되면 가상 현실의 실제성이 늘어날까?
그때가 되면, '이니까'라는 온정주의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외칠 수 있을까?


리얼리즘을 추구하고자 하면, 진짜 '리얼'이 되고 그게 아니면 추상성을 추구해야지.
영화 같은 게임이나 게임 같은 영화는 결국 리얼이 아니라, '현실'의 2차적 재현 혹은 재연에 불과한 것.

하긴 뭐... 요즘은 게임 같은 현실 / 영화 같은 현실도 난무하는 시대이니...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에 대한 질문은 (이미 10년전에 내버려진 클리쉐지만) 당분간 유효하리라.
Posted by OI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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